2008년 08월 17일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천재들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다 보면, 행간에서 작가의 인품, 성향, 사고방식 등을 느낄 수가 있는데, 보통 이런 것들은 에세이에서 확연히 드러나지만, 소설에서도 시나브로 드러난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어떤 작품이나 특정 수준 이상의 것들은 책을 읽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아 이 사람(책)은 뭔가 다르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 같다. (보통 상을 받거나, 베스트셀러가 되어 유명인이 되곤 하는 것을 보면)
최근 읽은 책들 중에 이런 작품들이 몇 있었는데,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소설)'
- 알렝드 보통의 '불안(에세이)', '우리는 사랑일까(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소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소설)', '비밀의 숲(에세이)'
이 그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사실 딱히 내 취향은 아니지만('뇌'도 부서에서 워크샵 갈 때 회사에 남아 있던 것을 빌려 보았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읽을만한 가치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보통의 책과 하루키의 책은 모두 사서(혹은 사달라고 하여) 보았는데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좀 더 내 취향에 맞는달까.
하루키의 책을 읽다 보면, 책 속에서 드러나는 가치관이 뚜렷하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기 위해 세상에 무얼 맞추고, 무엇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지 명확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아, 그의 삶의 방식에 매료된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능력도 사람을 매료시킨다.
베르베르와 보통의 경우는 어찌보면 비슷한 느낌이 드는 작가들이다. 이 포스팅의 제목도 두 사람을 생각하며 정한 것인데, 이 둘의 책을 읽다 보면 아, 얘네들은-_- 천재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둘 다 세상의 진실을 이해하고 싶어 숨겨진 비밀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추척해 가며 머리속 논리의 블럭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둘 다 사색의 깊이나 논리적 판단력이 일반인과 남다르게 월등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다만 베르베르는 이과형 천재-_- 보통은 문과형 천재라는 느낌이다. ;
이 두 녀석들이 하루키씨와 다른 점은 세상을 바꾸고 (혹은 뭔가를 깨우쳐주고) 싶어한다는 (것이 너무 드러난다는)점이다 -_-; 이 둘의 책은 잘 읽고 있다가도 중간 중간 이런 강요들이 "눈에 띄게" 튀어나오곤 해서, 사실 그때마다 책을 좀 읽기 싫어지게 만든다. (그렇다고 중간에 책을 덮어버리기에는 그들의 고찰은 너무 읽을만한다.) 책을 쓰는 목적부터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이 깨달은 것을 토해내고 싶은 심정. 그렇다고 '누구나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라는 노골적인 자기계발서식의 제목은 그들 성향에 맞지 않는 것이었을 수도. 하지만 나로서는 차라리 대놓고 일차원적으로 직격탄을 쏘는 그런 책의 제목이 오히려 목적과 결과물이 일치하지 않나 싶어, 더 호감이 간다.
보통의 경우 그의 눈부신 고찰이 빛을 발하는 에세이 '불안'에서 현대인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여러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고전을 읽는 것이다(해법2, 예술). 소설 또는 희극 등을 읽으면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독자가 고전을 읽으며 고전의 주인공들도 결국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여러 책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보봐리의 부인'의 경우 주인공의 허영심, 욕정, 나약함등을 보여주며 결국은 자살에 이르는 그녀의 삶을 그리고 있지만, 그녀가 순간 순간 느끼는 사소한 감정들의 묘사에서 그녀가 우리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라고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의 소설인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허영심많고 남들의 눈을 의식하며 사랑에 대한 모순에 가득찬 존재인 여자 주인공 '앨리스'를 전면에 내세우며 그녀의 모순됨을 까발리는 동시에 그녀도 결국 같은 인간이다,라고 느끼도록 소설을 진행시키는 것은 좀 독자에 대한 강요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베르베르와 보통 모두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 의 물음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해답을 얻기 위해 행하였던 수많은 생각들을 세상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하여 책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매우 많으며, 그 답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사색한다. 반면 하루키의 경우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그냥 결론 혹은 어느 순간의 깨달음만이 있을 뿐이다. 윤회의 사슬에서 보자면 하루키는 윤회 중후반기쯤, 베르베르와 보통은 윤회 초중반기의 상태라는 느낌이랄까.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의 컨셉 참고.) 참고로 나의 경우는, 매번 느끼지만 윤회 초반기임에 틀림없다. 하하;
그래서 나의 생각의 흐름은 보통을 재미있어 하며 따라간다. 하지만 하루키는 저런 사람도 있구나,하고 감탄하며 읽게 된다. 그저 그 곳에 있는 것만으로,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며 사는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읽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다. 그건 매우 놀라운 경지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키의 경우 자신 이외의 사람에 대한 관심은 나머지 두 작가에 비해 오히려 더 적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관심,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어째튼 세 명 모두, 동시대에 태어나줘서 다행이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인 것이다. :)
최근 읽은 책들 중에 이런 작품들이 몇 있었는데,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소설)'
- 알렝드 보통의 '불안(에세이)', '우리는 사랑일까(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소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소설)', '비밀의 숲(에세이)'
이 그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사실 딱히 내 취향은 아니지만('뇌'도 부서에서 워크샵 갈 때 회사에 남아 있던 것을 빌려 보았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읽을만한 가치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보통의 책과 하루키의 책은 모두 사서(혹은 사달라고 하여) 보았는데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좀 더 내 취향에 맞는달까.
하루키의 책을 읽다 보면, 책 속에서 드러나는 가치관이 뚜렷하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기 위해 세상에 무얼 맞추고, 무엇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지 명확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아, 그의 삶의 방식에 매료된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능력도 사람을 매료시킨다.
베르베르와 보통의 경우는 어찌보면 비슷한 느낌이 드는 작가들이다. 이 포스팅의 제목도 두 사람을 생각하며 정한 것인데, 이 둘의 책을 읽다 보면 아, 얘네들은-_- 천재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둘 다 세상의 진실을 이해하고 싶어 숨겨진 비밀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추척해 가며 머리속 논리의 블럭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둘 다 사색의 깊이나 논리적 판단력이 일반인과 남다르게 월등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다만 베르베르는 이과형 천재-_- 보통은 문과형 천재라는 느낌이다. ;
이 두 녀석들이 하루키씨와 다른 점은 세상을 바꾸고 (혹은 뭔가를 깨우쳐주고) 싶어한다는 (것이 너무 드러난다는)점이다 -_-; 이 둘의 책은 잘 읽고 있다가도 중간 중간 이런 강요들이 "눈에 띄게" 튀어나오곤 해서, 사실 그때마다 책을 좀 읽기 싫어지게 만든다. (그렇다고 중간에 책을 덮어버리기에는 그들의 고찰은 너무 읽을만한다.) 책을 쓰는 목적부터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이 깨달은 것을 토해내고 싶은 심정. 그렇다고 '누구나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라는 노골적인 자기계발서식의 제목은 그들 성향에 맞지 않는 것이었을 수도. 하지만 나로서는 차라리 대놓고 일차원적으로 직격탄을 쏘는 그런 책의 제목이 오히려 목적과 결과물이 일치하지 않나 싶어, 더 호감이 간다.
보통의 경우 그의 눈부신 고찰이 빛을 발하는 에세이 '불안'에서 현대인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여러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고전을 읽는 것이다(해법2, 예술). 소설 또는 희극 등을 읽으면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독자가 고전을 읽으며 고전의 주인공들도 결국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여러 책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보봐리의 부인'의 경우 주인공의 허영심, 욕정, 나약함등을 보여주며 결국은 자살에 이르는 그녀의 삶을 그리고 있지만, 그녀가 순간 순간 느끼는 사소한 감정들의 묘사에서 그녀가 우리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라고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의 소설인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허영심많고 남들의 눈을 의식하며 사랑에 대한 모순에 가득찬 존재인 여자 주인공 '앨리스'를 전면에 내세우며 그녀의 모순됨을 까발리는 동시에 그녀도 결국 같은 인간이다,라고 느끼도록 소설을 진행시키는 것은 좀 독자에 대한 강요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베르베르와 보통 모두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 의 물음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해답을 얻기 위해 행하였던 수많은 생각들을 세상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하여 책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매우 많으며, 그 답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사색한다. 반면 하루키의 경우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그냥 결론 혹은 어느 순간의 깨달음만이 있을 뿐이다. 윤회의 사슬에서 보자면 하루키는 윤회 중후반기쯤, 베르베르와 보통은 윤회 초중반기의 상태라는 느낌이랄까.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의 컨셉 참고.) 참고로 나의 경우는, 매번 느끼지만 윤회 초반기임에 틀림없다. 하하;
그래서 나의 생각의 흐름은 보통을 재미있어 하며 따라간다. 하지만 하루키는 저런 사람도 있구나,하고 감탄하며 읽게 된다. 그저 그 곳에 있는 것만으로,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며 사는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읽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다. 그건 매우 놀라운 경지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키의 경우 자신 이외의 사람에 대한 관심은 나머지 두 작가에 비해 오히려 더 적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관심,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어째튼 세 명 모두, 동시대에 태어나줘서 다행이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인 것이다. :)
# by | 2008/08/17 01:47 | 트랙백 | 덧글(11)





한달 전에 마늘술과 생강술을 담궜다. 사진에서 왼쪽이 마늘술, 오른쪽이 생강술이다. 